[영상 보도의 기술] '보이는 대로 묘사하지 말고 보이는 것에 의미를 더하라' 박성호 기자 강의
작성일 25.10.17
본문
"화면을 설명하라. 단, 복제하지 말라"
30년 베테랑이 주니어 기자에게 내린 회초리
글 : 이원호 머니투데이방송MTN 기자
"야 그림 먼저 보고 쓰라고 그림 먼저"
수습기자 시절 선배들에게 자주 듣곤 했다. 펜기자가 아닌 방송기자인 만큼 화면과 글이 서로 조화를 이루도록 써야 한다는 취지다. 초임병 때부터 내게 이 말은 일종의 격언처럼 새겨졌다.
여전히 햇병아리 연차의 기자임에도 불구하고 자주 게을러진다. 그림 보고 쓰기보단 쓴 대로 영상을 끼워 넣는 일이 잦다. 챙길 일정이 많아서, 시간이 없어서, 영상을 못 구해서…듣기에 그럴 듯한, 스스로를 위안 삼기 위한 핑계가 나날이 늘어간다.
영상 글쓰기는 무엇이 달라야 하는가. 지난 14일 진행된 박성호 기자의 강의는 느슨해진 나의 정신을 '새로고침'하도록 만들었다. 방송기자의 본분을 잊지 말라는 회초리처럼 느껴졌다.
박 기자는 MBC에서 보도국장과 워싱턴 특파원, 메인 앵커까지 거친 국내 최고의 전문가다. 그에게 올해는 꼭 경력 30년이 되는 해다. 그는 강의에서 "보이는 대로 묘사하지 말고 보이는 것에 의미를 더하라"고 수차례 강조했다. 30년 베테랑의 내공이 담긴, 2시간 분량의 강의를 간략히 글로 남긴다.
■ "뻔한 묘사를 피하고 서사를 담아라"
뉴스의 유형은 크게 두 가지로 분류된다.
첫째, 언어 중심 뉴스는 영상이나 사진이 단순히 기사의 보완재 역할만 하는 경우다. 정치나 법조 뉴스가 대표적인 예시다. 둘째, 영상 중심 뉴스는 사건·사고나 현장 고발처럼 영상 자체가 강력한 서사를 가지는 방식이다. 전자와 반대로 언어가 영상의 의미를 뒷받침하는 기능을 한다.
'영상 글쓰기'에서는 영상이 곧 이야기의 주체다. 방송기자는 그 영상의 리듬과 감정에 맞춰 문장을 쓴다. 단순히 '말로 전달하는 사람'이 아니라 '시청자의 시선을 설계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앞서 소개한 대로 영상 글쓰기의 가장 큰 원칙은 '그림에 맞춰 써라'다. 눈으로 보는 시각 정보와 귀로 듣는 청각 정보가 일치할 때 시청자는 본능적으로 집중하게 된다. 시청자의 마음을 건드리는 비주얼 스토리텔링의 핵심 기술이다.
영상과 언어의 동시화를 추구할 때는 '뻔한 묘사'를 피해야 한다. 비가 오는 화면에 "비가 오고 있습니다"라고 말하는 식이다. 화면이 인물을 드러내고 있다면 오디오는 그 장면의 의미나 분위기를 한 줄로 정리해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
확보된 영상을 설명할 때는 이면에 담긴 의미나 감정적 맥락을 풀어내야 한다. "울음소리에 경찰관들도 고개를 숙이고 눈시울을 붉힙니다" 대신 "아이를 잃고 울부짖는 소리에 견딜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라고 쓰면 서사적 가치가 더해진다.
궁극적인 경지는 화면에 직접 드러나지 않는 '부재의 존재'를 표현하는 것이다. 영상의 여백을 강렬하고 통찰력 있는 언어로 채우는 것이다. 카메라가 포착한 상징적 컷(멈춰버린 시계, 불이 들어오지 않는 전구)에서 '보살핌의 허기'와 같은 문장을 끌어내야 한다.
머리로 문장을 먼저 짜고 그에 맞게 영상을 붙인다는 사고에서 벗어나야 한다. 취재 단계에서부터 장면의 흐름, 인물의 동선, 감정의 변화를 염두에 둘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만 영상이 주는 정서와 기자의 언어가 자연스럽게 이어지고 화면의 호흡에 맞는 이야기 구조가 만들어진다.
화면을 묘사하는 것과 취재 내용을 설명하는 것은 번갈아 배치하면 좋다. 묘사만 계속되면 시청자는 피로감을 느끼고 설명만 있으면 영상의 생동감이 사라진다.
문장은 단문 위주로 구성하는 게 바람직하다. 영상의 호흡이 컷 단위로 빠르게 전환되기 때문에 오디오도 그 박자를 맞춰줘야 한다.
<박성호 기자가 '기사와 영상의 조화'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 "기술의 진보보다 감각의 진화가 시급"
컬러TV 등 영상 매체의 출현은 디지털 플랫폼의 발전과 함께 전례 없는 기술적 진보를 이룩했다. 그러나 화면 속 내러티브를 만드는 글쓰기 감각은 그만큼 진보하지 못했다는 게 박성호 기자의 지적이다.
<시사매거진 2580>이나 <MBC 뉴스데스크>의 전성기 시절에는 기자가 영상과 내레이션을 함께 설계하며 이야기의 구조를 짰다. 요즘은 뉴스 포맷이 다양해지고 꼭지도 많아졌지만 오히려 기자가 쏟는 '서사적 에너지'는 줄어들었다고 한다. 더 많은 뉴스를 만들어내는 동안 한 편의 뉴스에 대한 고민은 얕아진 셈이다.
영상은 더 생생해졌지만 기자의 언어는 점점 무뎌진 상황. 박 기자는 영상의 의미를 읽어내는 감각의 복원을 제안한다. 영상 속 인물의 표정과 공간의 분위기를 포착해 문장으로 풀어내는 능력, 즉 '감각의 진화'가 필요하다는 판단이다. 기술은 누구나 사용할 수 있지만 그 기술로 감정을 전달하는 감각은 훈련과 통찰에서 비롯된다고 말한다.
방송 저널리즘의 본질은 속도도 화질도 아니다. 사건의 맥락과 인간의 감정을 영상 언어로 번역해내는 일이다. 콘텐츠 과잉 시대에 시청자를 붙잡는 힘은 바로 그로부터 나온다. 내러티브를 주도하는 감각을 끊임없이 연마하는 것은 방송기자뿐만 아니라 모든 영상 콘텐츠 제작자들이 갖춰야 할 소양이다.
■ "방송기사도 팩트가 우선…AI 활용 조심스러워"
이날 현장에는 약 20명의 기자들이 자리했다. 아울러 20명은 유튜브 생중계로 강의를 시청했다. 다음은 강의를 마친 후 진행된 질의 응답.
Q. 감정 이입과 내러티브를 강조했다. 방송기사에는 기자의 주관이나 해석이 허용이 되는 건가.
A. 방송뉴스라고 해서 기자의 주관을 아무 때나 심을 수 있는 건 아니다. 팩트에 기반해서 서술하는 게 원칙이다. 오늘 강의에서 소개한 내용만이 바람직하다는 건 아니다. 방송기사에도 여러 형태가 있을텐데 영상을 읽어내는 과정에서 기자의 시선이 포함될 수 있다는 의미다.
Q. 기사에 담고자하는 감정에 따라 오디오 발성을 다르게 하는 게 좋은가.
A. 오디오 톤에서 감정을 드러내는 건 권장 사항은 아니다. 교육적·학술적 차원에서도 리포팅 톤을 따로 분석하는 걸 보기는 어렵다. 리포트는 어차피 화면과 팩트가 보여주기 때문에 오디오 톤에서 오버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다.
Q. 뉴스의 감정 전달 정도에 따라 시청률에도 차이가 있나.
A. 시청률이라는 결과값에는 여러 변인들이 작용한다. 질문하신 내용은 필요 조건이 아닌 충분 조건이 될 것 같다. 예컨대 영국 사회에서 BBC가 갖고 있는 독보적 위상이 있기 때문에 타 민영 방송이 범접하기 어려운 게 있다. 원래부터도 영국 사람들이 원래 BBC를 많이 보지 않겠나. 뉴스의 수준이 시청률에 영향을 미쳐 왔느냐를 검증하기가 쉽지 않다.
Q. 영상기자와 취재기자의 의욕이 잘 맞지 않는 경우가 있다. 찍어온 영상이 여의치 않을 때 취재 기자가 할 수 있는 최선은.
A. 현장에서 맞췄어야 할 부분이다. 충분히 상호작용하면서 서로 협의해가며 요청할 건 요청하고 리드할 건 리드하고 그래야 되지 않겠나. 찍은 게 없으면 취재기자가 할 수 있는 방법이 잘 없다. 답답하겠지만 그건 취재기자와 영상기자의 관계만이 아니라 우리 인생에서 자주 발생하는 문제다.
Q. 요즘에 영상이 부족할 때 AI를 활용하기도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는지.
A. 안 그래도 생각을 하고는 있는데 아직 뚜렷한 답변을 못하겠다. 어려운 주제다. 드라마·다큐 AI를 쓰는 것과 뉴스에서 AI를 쓰는 건 굉장히 다른 문제 같다. 뭔가 사실이 아닌 것을 AI로 메꿔서 전달하는 것 아닌가. 기술의 진보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기보다는 조금 조심해야 되겠다는 생각을 한다.
<박성호 기자가 강의 후 질의 응답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