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모임활동
[리치리치(Reach-Rich)] 언론인의 위험지역 취재와 트라우마 그리고 언론인들을 보호하는 법
2024.06.12
본문
언론인 트라우마 연구회 '리치리치(Reach-Rich)'가 지난 5월 30일 모임을 가졌습니다. 연구모임에서 제공한 강의 내용을 공유합니다.
□ 주제 : 언론인의 위험지역 취재와 트라우마 그리고 언론인들을 보호하는 법
□ 강사 : 김영미 PD/ 종군 언론인 (전 한국독립PD협회 위원장)
<리치리치 회원들이 김영미 PD의 강의를 듣고 있는 모습>
연구 모임 ‘리치리치’에서는 5월, 종군 언론인 김영미 피디의 ‘전쟁터에서 만난 사람들’을 읽고, 김영미 피디를 만나 종군 언론인으로서의 경험을 통해 배운 위험 지역 취재의 노하우를 배웠습니다. 또한 트라우마는 개인이 아닌 조직이 감당해야 할 책임이 있으며 사후뿐 아니라 사전에 어떤 투자를 해야 하는 지에 대한 조언을 들었습니다. 이후 최근 취재한 우크라이나 다큐의 일부를 같이 시청하고 관련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아래는 리치리치 멤버들의 김영미 피디와의 대화를 발췌, 정리한 내용입니다.
김영미 피디
오늘 얘기는 트라우마와 관련된 것이다 보니까 개인적으로는 저의 트라우마 극복 경험을 먼저 나누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전쟁터에서 만난 사람들’ 책 서문에도 썼지만 아직도 극복하지 못한 트라우마 이런 것들 것은 꺼내고 싶지 않은 것들도 많아요. 아프가니스탄 취재하고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내가 준비가 전혀 없었고 뭘 준비해야 되는지도 모르고 갔구나…2001년 2월에 방송했는데 당시 방송에서 가지고 있던 매뉴얼은 전쟁에는 먹히지 않는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되었고…또 돈이 너무 비싼 거죠. 현지 인력도 비싸고, 이번 우크라이나 취재에도 3억 7천만 원을 썼어요. 두 달간. 엄청난 돈인 거죠. 그러다 보니 함부로 덤비면 안 되겠다. 다시는 가지 말아야지 생각했는데 당시 KBS 일요 스페셜에 방송을 하기로 되어 있어 편집을 하다 보니 그때 내가 만났던 사람들을 계속 보게 되잖아요. 그게 위안이 됐어요. 어디서 날아온 지도 모르는 외국 여자에게 베풀었던 그들의 관심과 사랑, 정 같은 거 그게 나를 치유하더라고요.
그럼에도 어린 PD가 아프가니스탄 갔다 와서 터지고 막 그랬던 잔상들이 막 남아서 길거리를 걸어 다니지를 못하겠는 거예요. 분명히 지뢰가 없을 텐데도 어쨌든 뉴스에서 지뢰 얘기만 나오면 ‘거봐 내가 조심해야한다고 했지’ 그러면서 서울 시내를 걸으면서도 발걸음에 지뢰 있을까 봐 걱정하는 것은 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해서 다시는 그런데 가지 말아야지 했는데, 거기 사람들이 보고 싶더라고요. 그리고 내가 취재한 내용이 그들에게 위안이 됐으면 좋겠고 그런 생각을 되게 많이 했어요.
사실 딱 까놓고 얘기해서 섭외가 제일 힘들잖아요. 그것을 무너뜨리는 방법은 진심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번에 우크라이나 슬라브족들을 취재하면서도 표정이 없어요. 말도 안 하고 표정도 없고 그런 상황에서 현지 통역을 5명을 고용했어요. 5명의 역할을 다 나눠서 예를 들면 한 명은 섭외를 시키고 한 명은 통역을 하고 한 명은 서류작업을 시키고 하는 식으로…그리고 제가 처음 와서 오리엔테이션을 세게 시켰어요. 예를 들어 그냥 찍어주면 안 돼요라고 하지 말라, 반말로 하지 말라…정말 공식적인 말고 영어로 치자면 “플리즈 캔 유~” 하는 식으로 정중하게 얘기하도록 훈련을 며칠을 키셨어요. 그러고 나서 섭외하는 거죠. 현지인들의 적극적인 협조가 필요해요. 제가 하는 얘기는 트라우마가 생기기 전단계를 얘기하는 거예요. 반드시 내가 안전할 수 있는 돈, 파이낸스가 되어야 하고 예를 들어 게스트하우스와 공원 호텔과는 안전상태가 다르잖아요. 저는 출장 가서 숙소를 호텔로 잡는다고 하면 싱글룸 말고 거실이 있는 스위트룸을 잡아요. 거기서 인터뷰도 하고 문을 열고 들어오면 다른 문이 하나 더 있으니까 훨씬 안전한 거예요. 외신 기자들끼리 그 사회에서 듣는 얘기 중에 호텔에서 여성 기자들의 경우 성폭력을 당하는 일도 굉장히 많아요. 아랍의 봄 때 CNN의 한 친구가 취재하고 밤에 호텔에 돌아갔을 때 그런 일이 발생해서 회사를 그만둔 경우도 있었어요. 그런 경우를 생각해서 저는 반드시 여성 기자들은 문을 하나 더 열 수 있는 방을 꼭 잡아요. 돈이 좀 들지만 저는 그것은 회사가 배려해야 한다고 봐요. 또 저는 여러 번 가기 때문에 더 익숙한 호텔도 있고 절대로 안전하지 않은 지역의 호텔이나 그런 데는 가지 않고 증명된 곳의 장소만을 선택한다. 그렇지 않아도 취재하면서 트라우마가 생길 판국인데 다른 상황에서 트라우마가 생기지 않게 하는 것은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두 번째로는 나를 도와줄 현지의 전문 인력을 세팅을 하는데, 의사와 변호사예요. 내가 취재하는 기간 동안 우리 취재팀이 현지에 있는 동안 전적으로 맡아줄 의사, 외과 선생님이거나 정신과 의사이거나 고용을 해서 어떤 이슈가 발생했을 때 언제든지 전화 한 통화로 내가 그 서비스를 받을 수 있게끔, 내 직원이 도움을 받을 수 있게 세팅을 해요. 그리고 두 번째 변호사인데요. 예전에 터키 국경을 찍다가 KBS PD 하고 카메라 감독하고 통역하고 셋이 잡혀서 추방을 당한 거예요. 그런데 취재진은 가면 되지만 통역은 터키 여자하고 결혼해서 가족도 있는 상황이었어요. 그래서 한국으로 쫓겨와서 법정 투쟁을 했는데 제가 터키 국경에서 취재 경험이 있다 보니까 판사가 경험을 얘기해 주세요 그래서 제가 매뉴얼대로 얘기했어요. 첫째 우리는 터키 법무부에 신고를 해서 협조를 받았고 당시 레터를 다 가져갔어요. 또 터키 국방부하고 협조한 거 또 국경 쪽을 추진하는 경비 수비대가 있어요 거기 가서 촬영 허가받은 거, 그 서류작업만도 어마 무시했거든요. 그래도 저희는 다 절차 밟고 찍었어요. 그래서 충분히 찍었고 내가 찍을 때 터키 공군기가 엄호도 해주고 했어요. 취재팀은 다 똑같은 거예요. 가서 절차가 다 있는 거예요. 웬만한 서류 이런 것은 어느 지역을 가든지 다 처리해야 해요. 그러려면 변호사가 필요하 거예요. 변호사를 고용해서 우리 팀이 어떤 법적인 제재를 받거나 또 이쪽 정부의 저지를 받지 않도록 허가를 받을 수 있는 그 모든 것을 다 찾아내시라고 그렇게 해서 하고 있어요. 전문가의 힘이 꼭 필요했다고 생각하고 지금까지도 지키고 있어요. 그럼에도 이집트에서 한번은 경찰에 잡혀가서 바로 변호사를 불렀죠. 미연에 사고를 방지하고 현지 경찰에게 잡혀가거나 체포되거나 그 과정에서도 엄청난 트라우마를 입을 수 있기 때문에 미연에 방지를 하는 거죠. 또 KBS의 얘기를 하게 되는데 이라크에서 기자들이 한 호텔에 있었는데 그 입구에서 KBS 기자가 한 번 체포가 됐어요. 우리가 취재하다 보면 가방에 폭발물 분말 같은데 묻을 수 있는데 미군의 개가 바로 와서 앉아버리더라고요. 그래서 미군이 바로 플라스틱 수갑을 KBS 기자에게 채운 거야. 거기도 매뉴얼대로 한 것이긴 한데 한국 정부가 강하게 항의를 하니까 풀어주긴 했는데 트라우마 굉장히 심했다고 들었어요. 그리고 또 다른 KBS 기자는 팔레스타인에서 호텔에 있다가 잡혀갔는데 그 기자도 참 잘나가던 기자였는데 그 일 이후 위험한 곳은 안 가게 된 것 같더라고요. 트라우마가 그게 무서운 것 같아요. 그래서 저는 사후에 대응하는 것보다 생기기 전의 단계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예를 들어 저는 비행기를 내리면서도 최악의 상태를 예상해 입국 거부되면 어떻게 할 것인지, 짐을 풀어보라고 하면 가방이 몇 개이고 그 안에 뭐가 있는지를 다 외워놨어요. 그리고 까보라고 하면 적극 협조해요. 아프리카나 그런 데서는 돈 달라고 열어볼 때도 있거든요. 빨리 끝낼 수 있는 방법은 귀찮게 가방 풀지 말고 ‘얼마?’하고 물으면 너 싸게 해줄게 그러는 경우도 대부분이에요. 모든 시뮬레이션을 다 생각을 해 놔야 해요. 만약 같이 가는 스태프가 건강의 이슈가 있다고 하면 원래 예정한 출장 날보다 더 많은 약을 챙겨가라고 해요.
- 이번에 우크라이나에서도 전쟁 스트레스가 최고조로 올라가 있는 상황이었는데 가자지구나 시리아에서 봤던 거에 비해 미사일 자체는 옛날 구식 미사일이 날아오는데 그 특징이 터질 때 엄청 크게 터지는데 화력을 세지가 않아요. 또 날아오다 동력을 잃고 떨어지기도 하고요. 러시아에서 재고를 터는 것 같아요. 그러니 잘 맞지도 않고 아파트를 맞추죠. 그런데 이게 심리전이다. 매일 날아오고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사회 전반의 불안감이 굉장히 높아지고 그러한 상황에 장기간 노출되는 거죠. 그러다가 폴란드로 딱 나왔는데 너무 행복한 거예요. 폭격이 안 떨어지니까 하늘을 마음대로 쳐다볼 수 있다는 게 너무 좋더라고요. 그것을 보면서 만성 스트레스가 있었구나 사전에 준비를 많이 했어도 지속적으로 긴장 상태였던 거죠.
또 보통은 직원과 돌아가면서 운전을 했는데 너무 스트레스를 받아서 현지인을 고용했어요. 저와 직원은 운전대를 놓은 것이죠. 언제 어떤 취재를 해야 할지 모르니까 조직의 서포트가 없으면 안 되는 거예요. 투자가 필요한 거죠. 그래서 어쩌면 조직을 설득하는 작업이 사실 더 필요할 수 있어요. 사후를 자꾸 생각하지 말고 사전을 더 생각해 트라우마가 생길 수 있는 사정, 전문가들에게 의견을 받을 수 있게 하고 한국에서부터 그런 역할을 할 수 있는 전문가들을 확보해서 준비를 해야 되고 ‘내일 당장 비행기 타라’ 이러면 안 된다는 거죠. 그러려면 미리 분기별로 혹은 달 별로 만약에 이럴 경우 갈 사람 등을 미리 정해놔야 하는 거죠. 그리고 우크라이나든, 팔레스타인이든 갈 수 있는 준비를 다 해 놓고 혹시 안 가게 되면 괜찮고 그래도 사전 준비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런 얘기들을 외신 기자 선배들에게 들었어요. 자기네도 처음에는 잘 몰랐다가 지금은 회사가 서포트를 해주니까 사전에 준비를 했다고 하더라고요. 오랫동안 현장에서 취재한 외신 기자들이 저한테 많이 알려주고 도와줬던 게 있어요. 누구든 혼자 가서 그 많은 매뉴얼을 단방에 어떻게 깨닫겠어요. 경험이 축적되면서 시스템이 생기는 거죠. 그런데 우리는 그런 경험들이 잘 축적이 안 되는 것 같아요. 저번에 우크라이나 전쟁 때 폴란드로 온 우리나라 제작 취재팀들이 다 저한테 물어보는 거예요. 이라크, 아프간 때랑 같은 것을 물어보는 거예요. 그래서 보험, 옛날에 아프간 갈 때 그때 썼던 거 너희 선배들 다 안다 하면 그 선배 지금 퇴사하셨어요 그러니까 게다가 어떤 회사는 너무 신입을 보내는 거예요. 그러니 노하우가 축적인 안되죠. 누구에게 전수를 해서 사전에 이런 것을 준비해야 되고 이런 매뉴얼들이 필요한 거죠. 처음부터 갈 수 있는 사람 회사 차원에서 더 투자를 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요.
트라우마는 조직의 이슈예요. 조직의 결심이 필요해요. 제가 회사를 만들고는 지난해부터 한 달 유급 휴가도 도입을 했어요. 우크라이나 갔다 온 친구도 그렇고 전 직원 유급휴가를 줘요. 그동안 마음도 다독이고 그동안 읽고 싶었던 책도 읽고 자기 계발도 하고 언어도 배우고 그것을 회사가 보장해 주는 거예요. 저희 6월에는 전 직원이 다 휴가예요. 유급으로 휴가비까지 주고… 제가 그랬었거든요. 1년에 한 달을 나를 위해서 썼어요. 여행도 가고 친구도 만나고 그게 저의 트라우마를 치유하는데 좋은 포인트였던 것 같아요.
시스템을 만들어야 가능한 거지 혼자서는 안된다. 조직에 끊임없이 요구하고 트라우마 치료를 개인이 해야 한다는 발생에서 벗어나야 해요. 회사가 책임이 있는 거예요. 조직의 힘이 필요하다는게 저의 경험이에요.
Q. 리치리치 :의사와 변호사 고용은 언제부터?
김영미 피디
이라크전 2003년부터 그랬던 것 같아요. 심지어 개전 초기 우크라이나에 우리 못 들어가게 할 때는 폴란드에서 독일 언론인, 미국 언론인 고용해서 취재시켰는데 그때도 세 팀을 꾸리면서 의사와 변호사를 다 고용했어요. 취재하고 나와서도 건강검진 받고 상담도 받게 하고요. 저는 우리 회사 이름으로 나가는 리포트가 제대로 이렇게 언론인들이 잘 건강하게 나가는 것까지도 포함이 된다고 생각해요. 사람 나고 방송 난다고 생각하거든요. 트라우마 치료의 기본은 사람이어야 해요. 기본적으로 어떤 테크닉에 앞서 트라우마 관리에 대한 세팅 시스템을 어떻게 하냐가 저는 먼저여야 된다고 생각해요. 마음적 부상을 당했어도 치유가 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 그러한 메커니즘을 먼저 큰 그림을 만들어놔야 하는 거죠.
개인 역량으로 회사가 언론사가 굴러가는 게 말이 되는 얘기냐는 거죠. 취재는 시스템이 돌아가서 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저는 제가 우크라이나 취재 가 있을 때 우리 회사 직원들에게 24시간 카톡 열어 놔라 무슨 일 있을지 모르니까 대신 수당 지급하겠다 해요. 같이 서포트 하는 거죠. 서류작업을 현지에서 어떻게 하겠어요. 우리는 취재해야지 그러면 이메일 SNS 그런 것은 다 본사 사무실에서 처리하는 거죠. 번역팀도 서울하고만 통화하지 나는 몰라요. 그런 시스템화가 굉장히 중요한 게 개인 역량으로 맡겨 버리면 트라우마가 세질 수밖에 없어요. 취재도 전쟁인데 업무도 전쟁이야 사람과의 전쟁이야 그러면 정말 트라우마가 생길 수밖에 없지 않나요?
제가 미국에 있을 때 시애틀에 있었던 이유가 공군 기지 안에 미국 최고의 군 트라우마 PTSD 치료 병원이 있었어요. 제가 미군 임베딩 취재를 하고 나니까 미국 정부에서 제안을 했어요. 치료를 받아도 된다고요. 그때 시사인 다닐 때인데 미국 주재원으로 나갈 수 있게 해줬어요. 그래서 3년 가까이 트라우마 치료를 받았는데 효과가 너무 좋았어요. 주치의도 있었고 테라피스트들도 있었고 어떨 때는 우리 집에 와서 한 일주일 동안 같이 상주하면서 행동 관찰 단계부터 나에게 맞는 솔루션도 제안해 주고 그런 식의 치료를 받았고 그 결과가 아주 놀라웠어요. 이라크 갔다 와서는 미군의 그 프로그램이 도움이 많이 됐어요.
사실 우리가 영화나 이런 데서 전쟁을 보면 냄새가 없잖아요. 냄새가 플러스되는 순간 머리가 진짜 돌아요. 그리고 너무나 슬플 사람을, 상처받은 사람들을 지속적으로 만난 다는 거는 아무리 취재의 의무와 취재진으로서의 중립을 지킨다 해도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어요. 다 안아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죠.
이번 우크라이나 다큐 관련해서도 슬라브족들을 대하기도 어려웠고 카메라 앞에 세우기도 굉장히 많은 설득작업이 있어야 했고 이 사람을 러시아에서 혹시 보고 보복하지는 않을까 두려워하더라고요. 그러한 몇 가지 허들을 넘어가면서 촬영을 해야 하다 보니 2달이 넘게 걸린 거예요. 보통 해외 출장을 간다고 하면 6박 7일, 7박 8일 그런데 그것으로 다큐를 어떻게 만들겠어요. 취재원과 인간적인 라포를 형성하기도 전에 우리는 나가게 되는 거죠.
이번 다큐를 찍는데 젤렌스키 대통령 측에서 대통령의 24시를 찍겠냐는 제안이 온 거예요. 그런데 저희는 우크라이나의 전쟁을 속살까지 보여주는 거를 목표로 하고 있었기 때문에 거절했어요. 그랬더니 취재 내내 대통령 인터뷰라도 넣어달라고 했는데 제가 안 넣었어요. 대통령한테도 미안하지만 나는 당신이 우크라이나 대표라기 보다 평범한 시민들이 대표했으면 좋겠다고 충분히 설명드렸어요. 진짜 특종은 비탈리 킴이라고 젤렌스키의 가장 막강한 대선 경쟁 상대자가 비탈리 미콜라이우주 주지사인데 아버지가 한국 사람이예요. 비탈리 킴 쪽에서도 자기 찍어달라고 그래서 다음번에는 내가 한번 해볼 수 있겠다. 그런데 지금은 평범한 우크라이나 사람들만 보고 싶다 그렇게 얘기했어요. 그런데 만약 대통령이 됐는데 취임사에 한국어를 하면 끝장이겠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우크라에 더 관심을 갖게 되는 거예요.
격전지역들이 다 고려인들이 사는 곳인데, 과거 소련에서 고려인들 강제 이주 시킨 곳들이에요. 그래서 한국과 연관이 많아요. 고려인들에게도 관심이 되게 많은데 한국인들이 관심이 없으면 누가 이 사람들에 관심을 가져주려나 싶은 거죠. 그런데 우크라이나를 다시 가려면 제작비를 벌어야 하는데 모르겠어요. 못 벌면 못 가고 누군가가 취재를 그쪽을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가지고 있어요. 키우에서 고려인들은 식량을 사서 죽음의 택배, 밀가루, 국수 이런 것을 박스에 담아서 트럭에 싣고 달리는 거죠. 정말 배달의 민족인 거예요. 우크라이나를 취재하는데 제가 다 독점해야 한다는 게 너무 슬퍼요. 안타깝고. 우리 대통령이 우크라이나에 3조를 약속했어요. 미국보다 1조 적게 주는 거예요. 그러면 이 전쟁에 돈이 어떻게 쓰이고, 정말 어떤 효과가 있고, 우크라이나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언론인들은 알려야 된다고 생각하고. 지상파는 이슈에서 멀어져도 해야 하는 의무가 있다고 생각해요. 나는 내 회사를 갖고 있으니까 마음대로 할 수 있으니까 갔다 온 거지만 사실 궁극적으로는 지상파가 역할을 해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저는 제가 항상 최후의 보루라고 생각하거든요. 지상파가 도저히 못 가면 나라도 가야 된다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에 항상 예비군처럼 취재하기 전 상태를 유지하려고 해요.
실제로 지상파가 못 가서 갔던 게 소말리아 해적 때였어요. 우리나라 선원이 잡혀 있는데 AP가 찍었더라고요. 대한민국 이슈인데 국민들에게 변명의 여지가 없다고 생각해서 갔어요. 처음에는 한, 두 번 지켜보고 뒤로 빠지려고 했는데, 한 달이 지나도 안 가더라고요. 그래서 진짜 갈 선수가 없나 보다 해서 간 거죠. 납치 100일째 되는 날 배에 들어가서 취재하는데 찍고 나오는데 선원 중에 한 명이 목을 조르면서 ‘니년 혼자 살아나가냐’ 하면서 막 눈이 뒤집힌 거예요. 100일째 억류가 되다 보니 그렇게 된 거죠. 그때 나랑 같이 간 현지인이 총을 갖고 있어서 공포탄을 쏘니까 풀어주더라고요. 그분이 지금은 저한테 되게 미안해하거든요. 그런데 당시에는 희망이 없다고 생각하니 그랬다더라고요. 반드시 풀려나게 하겠다 그러고 나왔던 것인데 방송하고 난 뒤 또 외교부하고 한 판 할 게 걱정되기도 하고, 선원들이 풀려나야 하는데 모르겠으니 걱정이 되기도 하고 딜레마도 많았고 그러다 보니 소말리아 다녀온 것에 대한 트라우마는 아직도 있어요. 되게 피곤하면 꿈속에서 내 목을 조르는 게 그대로 느껴져요. 그래서 정신과 의사 선생님하고도 계속 얘기를 했거든요. 그래서 저의 원천적인 공포의 근원이 뭔가 하면 난 누가 날 죽일까 봐 늘 걱정하고 그래서 너무 무서울 때가 많다는 거죠. 저 사람이 칼을 갖고 있지 않을까 자꾸 그런 생각을 하게 되고요. 그랬더니 저희 주치의 선생님이 그런 말씀을 하셨어요. ‘김 PD, 서울 시내 한복판에서 대낮에 칼로 찌르고 그러지 않는다 거기서 벗어나라’ 그런데 그 주치의 선생님이 진료실에서 칼에 찔려 돌아가신 거예요. 나한테 그 말 한 지 일주일도 안 됐었던 때니까 한동안 또 막 힘들었어요. 그것 때문에 양복 주머니에서 뭘 꺼내기만 해도 저는 깜짝 놀라요. 온몸이 사시나무 떨듯이 떨리고요.
미국에 있을 때 저희 주치의가 그런 말을 했어요. 너는 트라우마로 인한 불안감을 갖고 있는데 그것을 제로로 만들 수는 없다. 대신 인정하라고 하더라고요. 내가 그런 증상이 있고 정신과적인 치료를 받아야 된다는 것을 부정하지 말라고요. 그래서 기왕이 트라우마를 얻었으니 의무라도 다하고 싶다 생각하고 있어요. 종군 취재가 대가 끊길 수도 있지만 그때까지 최선을 다해 현장에 가고 다음 세대를 기르기 위해 직원들을 트레이닝 시키고 있어요. 우리 직원들은 외국 회사로도 스카우트될 수 있긴 한데 가능하면 한국에서 명맥을 이어가면 좋겠다 얘기를 해요. 조직 시스템도 갖추고 그동안 쌓아 놓은 취재 노하우, 현지 인맥도 전수하고 싶어요. 그리고 직원들에게도 일선에서 할 때 독점하지 마라 얘기해요. 소말리아 취재 이후 그 다음부터는 지상파들에게도 나눠주고 있거든요. 그래야 노하우가 셰어된다고 생각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