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랑오랑서울] 화교·화인 경제는 동남아시아 경제의 잠재력일까, 장애물일까
작성일 25.0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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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랑오랑 서울'이 지난 5월 15일 모임을 가졌습니다. 모임에서 제공한 강의 내용을 공유합니다.
□ 주제: 화교·화인 경제는 동남아시아 경제의 잠재력일까, 장애물일까
- 김종호 서강대 동아연구소 교수
<연구모임 '오랑오랑 서울'에서 김종호 교수가 강연하는 모습>
동남아 화인 사회는 초기 식민 시기부터 다양한 지역에서 이주해와 현지 문화·정치에 융합하거나 적응하며 정착했다. 특히 필리핀, 인도네시아, 태국 등에서는 화교들이 이름·종교·정체성까지 현지화하면서도 상업적 기반은 유지했다. 중국 남부 푸젠성과 광둥성 출신 화교들은 자본을 동남아로 송금하며 양국 간 비공식 경제 연결고리를 형성했고, 청나라 정부도 이를 지원했다. 화교들은 민족·국가 정체성보다 '디아스포라'적 정체성을 더 강하게 인식하며, 이중적·혼종적 정체성은 생존과 번영의 전략이 되었다.
동남아의 화인들은 지역을 초월한 클랜·언어·혈연 기반 네트워크를 통해 경제력을 축적했고, 중국 본토와도 비공식적 연결을 유지해 왔다. 반면 인도계 이민자들은 카스트와 지역에 따라 분산되고 조직화가 어려워 제한적 역할만 수행했다. 최근 화인들은 중국을 협력보다는 경쟁 대상으로 인식하기 시작했고, 본토는 화인 자본을 자국 산업 발전에 활용하려는 전략을 추진 중이다. 특히 광둥성과 주강 삼각주는 화인 자본과의 연결이 깊으며, 중국은 이를 기반으로 자유경제권 확대를 꾀하고 있다. 화인들은 변화에 유연하게 적응하며 생존해 왔고, 앞으로도 다양한 방식으로 이 구조에 편입되거나 재조정될 가능성이 높다.
화인들은 동남아 민간 경제의 핵심을 이루며 엄청난 부를 축적하고 있으나, 외부에는 정보 공개를 극도로 꺼리고 폐쇄적 네트워크를 유지한다. 이들은 정부나 외국 기업과의 직접 협력보다는 혈연·지연 기반 신뢰 관계를 중시해 외부 진출이 어렵다.
냉전기 미국은 이들이 중국과 교역하며 공산 진영을 도울까 경계했고, 실제 밀수 사례도 존재했다. 기업가로서 이들은 사상보다 시장을 중시했으며, 이는 서구적 시각에서 충돌을 일으켰다. 이후 1997년 외환위기를 기점으로 화교 자본은 찬양에서 비판의 대상으로 전환되었다.
이러한 담론 변화는 외부 환경의 영향을 받았으며, 화인 자본 형성 과정은 역사·정치·사회적 맥락 속에서 재조명되어야 한다. 특히 1830년대 자바의 네덜란드 식민 지배 하 강제 경작 제도는 토지 박탈과 빈곤을 낳았고, 이후 서구 열강은 상품작물 중심의 경제 시스템을 동남아 전역에 확산시켰다. 동남아시아 식민지 체제는 강제 경작과 상품작물 생산 위주로 구성되었고, 인구 부족 문제 해결을 위해 중국과 인도에서 대규모 이주노동자를 들여왔다.
특히 화인은 중간 유통·무역 계층으로 자리 잡았다. 그 과정에서 원주민은 배제되고, 식민지 경제의 수익은 제국과 이주민들이 나눠 가졌다. 자본은 다시 본국과 중국으로 송금되어 지역 경제에 환류되지 않았다.
이 구조 속에서 화인은 제국의 중간 계층으로 성장했고, 주요 이주는 복건성, 광둥성, 해남도 출신으로 방언과 지역별 네트워크를 유지하며 정착했다. 식민지 시기 동남아에서는 화인들이 매춘·도박 등 세금이 붙는 민간사업을 맡고, 식민 정부는 이를 통해 막대한 세수를 확보했다. 특히 아편세는 전체 세입의 3분의 2에 이를 정도였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동남아 국가들이 독립하며 민족주의가 대두되었지만, 화인 자본은 기존 식민 구조 속에서 남은 공백을 채우며 민간 경제를 계속 장악해 갔다.
이 과정에서 정치 엘리트는 국영 인프라와 기간 산업을 장악하고, 화인은 유통·부동산·금융에 집중했다. 화인 자본은 정치에 개입하지 않는 대가로 경제를 일부 위임받는 구조가 형성되었고, 원주민의 중산층 성장은 오히려 억제되었다. 부를 축적한 화인들은 민족주의 담론 속에서 비난의 대상이 되었으나 실제 국부는 정치 엘리트와 국유기업이 더 많이 차지하고 있다.
동남아 화인 자본은 민간 경제를 장악했지만, 제조업에는 거의 투자하지 않고 금융·부동산·유통 등 유동성이 높은 분야에 집중해 왔다. 이는 불안정한 제도와 부패한 정치 환경에서 자산을 보호하려는 전략이자, 비공식적 연고 네트워크에 기반한 생존 방식이었다. 그 결과 화인 자본은 축적엔 성공했으나 확장성은 낮고, 대기업화도 이뤄지지 않았다.
최근엔 젊은 세대들이 IT, 앱, 벤처 투자 등 디지털 분야로 자본을 전환하고 있으며, 이는 고용 창출과 산업적 파급 효과는 낮아 중산층 형성에 기여하지 못한다. 정치 엘리트들은 원주민의 중산층 성장을 억제하며, 국유기업과 결탁해 비효율적 구조를 유지한다. 향후 동남아 경제의 건강한 성장을 위해선 화인 자본과 국유기업 간 경쟁을 유도하고, 원주민 민간 자본을 육성하는 제도적 전환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