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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미디어연구회] 자이니치 연구자 활동으로 본 조선통신사의 현대적 재발견

2023.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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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미디어연구회(간사: 김보미 경향신문 기자)'가 8월 17일 모임을 가졌습니다. 

연구모임 대표이자 간사인 김보미 기자가 정리한 내용을 공유합니다.


□ 주제 : 자이니치 연구자 활동으로 본 조선통신사의 현대적 재발견

□ 강사 : 야마구치 유카 서울대 일본연구소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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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미디어연구회 회원들이 야마구치 유카 서울대 일본연구소 박사의 강의 중 촬영한 사진>   


1. 연구 주제로 조선통신사를 포커싱한 배경

- 조선통신사의 존재는 한국인 할아버지, 어머니에게 들어서 알고 있었다. 어머니가 1970년대 일본 유학을 와서 프리랜서 저널리스트 활동하며 사가현 한일교류단체(CCC)를 만들었다. 고등학생 때까지는 한국어도 못했고, 한국에 대해 잘 모른 채 어머니가 하는 행사만 도왔다. 어렸을 때부터 정체성에 대한 갈등이 있어 이 문제와 전혀 다른 분야에서 일하려고 했다. 사쓰마야키(薩摩燒, 가고시마 도기) 14대 심수관에 대해 쓴 시바 료타로의 ‘고향 잊기 쉬운 계절’ 강의를 들었고, 도예를 통해 한국과 일본에서 어떻게 살아왔는지에 감명받았다. 연구자의 입장에서 한일 관계를 공부하고 싶다는 생각이 처음 들었던 계기.

- 규슈대에서 한일 관계를 전공하면서 한일교류사를 공부했고, 대마도로 혼자 여행 갔다가 조선통신사 관련 사적을 실제로 보고 연구 주제로 관심을 갖게 됐다. 부산에서 열린 조선통신사 축제에도 갔다. 일본 무사 복장, 통신사 의상을 입은 한국인들이 이순신 동상 축제를 즐기는 것을 보고 통신사의 의미를 생각하게 됐다.

- 통신사의 기록을 한국에서는 일본에 문화를 전파했다는 우월적 이벤트로, 일본에서는 한국이 조공을 했다는 식민사관으로 이용하기도 하지만 둘 다 일방적인 관점이다. 12번의 조선통신사가 파견된 조선 후기, 에도시대는 260년 한일 관계가 평화로웠던 드문 시기이기도 했다.

- 내용을 보면 재미있는 것도 많다. 조선 사람이 오이가 너무 먹고 싶어 해서 어렵게 구해줬다는 이야기. 에도시대 일본은 고기를 먹지 않았고, 먹는 행위 자체를 불성시 했는데 통신사들을 위해 별도의 공간을 만들고 고기를 잡는 사람들이 통행하는 문을 만들어서 식사로 대접했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통신사 대접은 동선에 위치한 막부의 번들이 알아서 예산을 조달했는데 한번에 400~500명씩 오는 조선통신사 대접이 보통 부담은 아니었을 것이다.

- 일본에서는 1979년 조선통신사를 주제로 한 영화가 만들어졌다. 2002년 한일 교류의 해를 기념해 뮤지컬도 만들어졌다.


2. 한국과 일본 통신사 연구 차이점

- 일본에서 조선통신사 연구가 활발해진 것은 1970년대 말이다. 1960년대까지는 한일 교류가 없었고 한국에 대해 아는 것도 많지 않았고 관심도 높지 않았다. 서울이 올림픽 개최지로 확정되면서 한국에 대한 궁금증이 커지기 시작했는데 연구에 불을 지핀 것은 재일 한국인들이다. 신기수나 강재언 등 자이니치 역사학자들이 알려지지 않았던 조선통신사를 재발견하고 전파했다. 차별의 시대에 한국인과 일본인, 재일교포의 경계를 초월한 인간의 연대를 다루는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오사카 중심으로 연구가 이뤄진 것은 자이니치가 많은 지역적 특성도 있다. 특히 신기수는 한국에서 태어나 교토에서 자란 후 고베대를 나왔는데 한일관계사를 주제로 많은 책을 썼고 영화도 만들었다. 1979년 50분짜리 다큐멘터리 <에도 시대의 조선통신사>를 발표했는데 일본에서 상당히 주목을 받았다. 오랜 항구도시인 고베는 한국전쟁 당시 전쟁 물자가 가장 많이 오가는 장소여서 반전 운동도 많이 일었던 지역적 특성도 있다. 

- 한국은 1990년대에 와서야 연구가 본격화됐다. 이전까지는 반일 분위기가 워낙 컸고, 서울 올림픽을 치르고 나면서 일본에 대한 관심도가 높아졌다. 1982년 ‘역사 교과서 파동’으로 일본 역사와 한일 관계에 대한 시민들의 관심이 높아진 것도 영향을 줬을 것이다. 부산에서 통신사 관련 단체나 행사가 가장 활발하게 조직된다. 대마도로 떠나기 전에 해신제를 올리던 영가대도 있고 축제도 계속 연다. 최근에는 부산 엑스포 개최와 연관해 통신사를 콘텐츠화 하는 움직임도 있는 것 같다. 2013년에는 한일합작으로 <‘이예(李藝)’-최초의 조선통신사>라는 다큐멘터리 영화가 개봉했다. 배우 윤태영씨가 주인공.

- 조선통신사가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된 것도 뒷이야기가 있다. 사실 세계유산은 문화/기록/자연으로 나뉘는데 문화유산이 되려면 물질이 있어야 한다. 유적은 일본에는 여전히 남아 있다. 당시 통신사가 체류했던 절이나 숙소들이 보존돼 있다. 하지만 한국에 남아 있는 것이 없다. 대신 한국은 당시 고위직이었던 통신사들이 남긴 일기 등이 자세히 남아 있다. 한일의 동등한 기여를 위해 문화가 아닌 기록유산으로 등재한 것이다. 한국인과 일본인이 같은 역사를 공유하는 흔치 않은 지점이다.


3. 통신사 관련 연구 자료가 새롭게 발견되기도 하는지.

- 1980년대 일본 내 조선통신사 연구 모임이 3년 정도 유지됐는데 당시 소감문 자료가 있다. ‘몰랐던 역사를 알게 됐다’ ‘왜 이제까지 몰랐을까’ 등 긍정적인 후기가 많지만 기억에 남는 기록이 하나 있다. 결국 통신사 연구도 한일 양국의 관계에 따라 혹은 각 개인이 가진 국가주의·민족주의에 기반해 관심도가 달라진다는 후기가 있었다. 따라서 ‘몰랐던 역사를 알게 돼서 기쁘다’로 끝나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조선통신사는 임진왜란 이후 한일 교류가 단절된 기간보다 훨씬 긴 200년간 12회에 걸쳐 유지됐던 양국 교류의 역사다. 그 평화를 위한 교류의 가치가 인정돼 세계유산이 됐다.

- 양국의 정치 대립이 심각한 것은 사실이지만 한일 사람들도 그에 영향을 받게 되는 것은 서로를 제대로 모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