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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차세대 언론인 연구모임] 한일의 역사적 교류 현장인 부여 탐방 7월 모임

2022.08.16

본문

한일차세대언론인공부모임(대표: 허문명 동아일보 부국장)은 

지난 7월 9일 백제의 흔적이 남아있는 부여의 주요 문화와 유물, 

유적지를 방문하여 이병호 공주교대 교수와 함께 한일의 역사적 교류의 흔적에 대해 함께 공부했습니다.

한일차세대언론인공부모임에서 정리한 내용을 공유합니다.


□ 부여에서 만나는 한일교류 현장 

   - 정림사지, 국립부여박물관, 부소산성, 고란사, 낙화암, 백마강, 백제왕릉원 등 백제의 흔적이 남아있는 주요 문화와 유물, 

     유적지를 방문하여 한일의 역사적 교류의 흔적에 대해 함께 공부함. 

   - 백제는 475년 고구려의 침공으로 국가의 존망이 위태롭게 되자, 한성에서 웅진(현 공주)로 수도를 옮김. 

     이후 고구려와의 전쟁에서도 승리하여 무령왕 때에는 국력을 회복하게 됨. 백제는 중국의 선진문물을 받아들이며 새로운 도약의 시기를 맞이하는데, 

     이후 중국, 일본과 교류 등 국가의 중흥을 위해 538년 사비(현 부여)로 수도를 옮기게 됨. 사비 시대 백제인들은 중국의 선진문물을 받아들이고, 

     이를 발전시켜 신라, 가야, 일본 등에 전수하는 등 문화 교류의 선구자적 역할을 하였음. 

   - 정림사지&정림사지5층석탑: 국보 제9호. 부여에 중심부에 위치한 정림사지는 사비시대 수도의 가장 중심적인 위치에 있었던 사찰임. 

     정림사지 5층석탑 표면에는 당나라가 백제를 멸망시킨 전승기념의 내용이 새겨져 있는데, 백제 왕조의 명운과 직결된 상징적인 공간으로 정림사가 존재하였음을 시사함.

   - 부소산성: 백제 사비도성의 배후산성과 왕궁성으로 추정됨. 

     웅진에서 사비로 수도를 옮기던 백제 성왕 16년(538)에 왕궁을 보호하기 위해 이중(二重)의 성벽을 쌓은 것으로 여겨지며, 

     동성왕 22년(500)경에 이미 산 정상을 둘러쌓은 테뫼식 산성이 있던 것을 무왕 6년(605)경에 지금의 모습으로 바꾼 것으로 짐작되어 

     백제 성곽사를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음. 

   - 낙화암&고란사&백마강: 백제가 멸망할 때 낙화암에서 사라져간 궁녀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지은 사찰로 여겨짐. 

     낙화암은 백제 의자왕 20년(660년) 나(羅)·당(唐) 연합군의 공격으로 백제의 수도 사비성이 함락될 때, 

     백제의 3천 궁녀가 백마강(白馬江)을 향해 몸을 던졌다는 전설에서 유래한 바위이지만, 

     실제 3천명에 달하는 궁녀였다기 보다 이는 소설에서 확산된 것으로 여겨짐. 

   - 백제왕릉원: 백제 왕릉으로 추정되는 무덤으로 사적 제14호임. 

     일곱 개의 능이 모여 있다고 해서 능산리란 지명이 붙여진 곳으로 왕족의 능이라 짐작은 되지만, 

     누구의 능인지는 알 수 없음. 능산리 무덤들은 일찍이 도굴되어 약간의 유물만 수습되었을 뿐이며, 

     무덤들 서쪽에서 절터가 발굴되어 백제금동대향로(국보 제287호)와 백제창왕명석조사리감(국보 제288)이 출토되었는데, 

     이로 인해 능산리 무덤들이 왕실 무덤지역라는 것이 확인됨.

   - 백제와 일본의 교류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백제와 일본의 교류가 가장 활발했던 시기는 근초고왕대, 

     국교 수립 후 양국은 꾸준히 문물을 교류하였음. 일본 곳곳에서는 백제의 문화가 남아있음. 

     아스카, 나라시대의 일본의 사원은 백제인 등 한반도 이주민들의 기술로 건립되었으며, 

     유교와 불교를 비롯하여 건축, 조각, 회화 등의 대부분이 백제의 학자, 승려, 유민 등에 의해 전수되었다고 여겨짐. 

   - 백제의 선진 문물과 종교가 전파된 이후, 나라 시대 일본은 문화적으로 굉장히 융성한 국가로 성장했음. 

     특히 6~7세기 쇼토쿠 태자의 섭정 시기가 아스카문화가 성행하던 가장 대표적인 시대로, 

     그는 유교와 불교 사상을 바탕으로 헌법을 만들고 백제뿐 아니라 수나라에도 사신을 보내 선진 문물을 받아들이는 등 

     강력한 왕권을 추구했음. 아스카문화의 영향을 받아 지은 사찰과 불상은 지금까지도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음. 

     대표적으로, 호류지, 아스카데라, 도다이지 등이 남아있음. 일본은 아스카문화를 경험하면서 문화적·예술적으로 융성해졌을 뿐 아니라, 

     그들 사상의 근간이 되는 정신과 내세관을 확립할 수 있었고, 백제를 통해 전수받아 일본에서 꽃피운 아스카문화는 

     지금도 많은 이에게 영향을 미치며 보존되고 있음. 

   - 일제강점기에 이루어진 일본인 고고학자들의 고적 조사 사업에 대한 평가는 그 입장에 따라 큰 차이가 있음. 

     실제 조사에 참여했던 당사자들은 ‘일본인이 한반도에 남긴 사업 중에서 세계에 자랑해도 부족함이 없는 기념비적인 것이었다’고 주장하지만,

     대부분의 한국 연구자들은 ‘우리 민족의 문화재를 파괴, 약탈하는 것이었고 그 성과는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하는 것이었다’고 주장함. 

     그들의 연구 목적과 시각은 학문적 순수성이라기 보다는, 일본 고대사를 이해하기 위한 타자화된 시선에서 비롯되었다고 봄. 

   - 한편, 익산은 백제의 전략적 거점으로 주목받았으며, 백제의 궁궐터가 있었다고 전해지는 곳임. 

     왕궁리 유적의 왕궁 배치와 미륵사지의 건물터들은 백제의 건축 기술이 절정에 이르렀을 시기의 유산임. 

     본 모임은 추후 후속 탐방의 일환으로 익산 지역을 방문하기로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