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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미디어연구회] ‘한일 영화 교류’ 주제로 6월 모임

2022.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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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미디어연구회(대표: 김보미 경향신문 기자)는 지난 6월 16일 프란치스코 교육회관(정동 소재)에서 나리카야 아야 동국대 일본학연구소 연구원(前 아사히신문 기자)을 초청해

‘한일 영화 교류 - 80~90년대를 중심으로: 한류 전야부터 오늘까지’를 주제로 연구모임을 가졌습니다. 

나리카야 아야 연구원은 한국 영화를 너무 좋아한 나머지 아사히신문 기자를 그만 두고 한국 영화 관련 일과 공부를 하게 됐다고 합니다.

당일 진행된 강연 내용을 공유합니다.(한일미디어연구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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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과 일본의 문화 교류


(1) 최근의 한일 영화 교류

올해 6~8월 일본에서 개봉하는 한국 관련 영화가 14개 작품.

<브로커> <폴란드로 간 아이들> <모가디슈><수프와 이데올로기> <세자매> <랑종> <메기> <연애 빠진 로맨스>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 <킹메이커>

<인트로덕션> <당신 얼굴 앞에서> <샤크: 더 비기닝> <더 박스>. <모가디슈>가 가장 흥행할 거 같고, 나머지는 매니악한 장르이긴 한데 이렇게 많은 개봉은 처음이다.

이유는 고레에다 감독의 영향력인지 정확한 원인은 모르겠지만 이례적이다. 

한국에서 6월 8일 개봉한 <브로커>가 일본에서 6월 24일 개봉하는데 30개 정도 개봉관을 잡았으니 꽤 많은 편이다.

일본은 지역별로 시기를 달리해서 영화를 개봉한다.

전국 동시개봉은 거의 없다. 시차로 인해 입소문이 확산되기도 한다.

전국에 상영관이 최대로 해도 100개 정도일 거다. 시골 지역에는 1~2개, 도쿄도 10개 정도다. 


(2) 한국 배우와 자본, 일본 거장의 만남 <브로커>

고레에다 히로카즈(是枝裕和) 감독, 송강호, 강동원, 배두나, 이지은(IU), 이주영 출연. 송강호 칸 국제영화제 남우주연상 수상했다.

고레에다 감독은 ”송강호 배우가 영화의 시작. 사회적인 이유보다 송강호 배우”라고 말했다.

영화의 배경인 한국. 버려지는 아이가 일본보다 10배는 많다고 한다.

아이유 캐스팅은 <나의 아저씨>가 계기. 야마자키 유타카 촬영 감독이 팬이라고 한다.

아이유는 다른 배우들보다 좀 늦게 캐스팅 됐는데, 코로나19 영향으로 넷플릭스 가입자가 늘었고 한국 드라마가 인기를 끌면서 나중에 아이유의 존재를 알게 됐을 것.

고레에다가 한국 영화는 잘 아는 편이었겠지만 드라마는 잘 몰랐을 거다. <브로커>의 후지모토 신스케(藤本信介)는 <아가씨>를 비롯해 한일 관련 영화 24편 조감독/통역 맡기도 했다.

고레에다는 본인 영화 출품 안 한 때까지 포함해서 15번 정도 부산국제영화제에 참가. 부산 일본학교(전교생 40명 정도)에도 찾아가기도 했다.

한국에 대해서는 “영화인도 관객도 스태프도 모두가 젊다”고 했다. 일본은 영화계 전체가 고령화가 심각하다. 


(3) 한류 붐 전의 한일 문화 교류

기억 못하겠지만 2005년 12월 명동에 일본 직영 영화관 CQN 오픈했었다.

‘시네콰논’ 이봉우(李鳳宇) 대표가 만든 것. 고레에다가 이봉우 대표와 만난 것도 한국과 작업하는 데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재일교포인 이 대표가 1989년 시네콰논 설립해서 <달은 어디에 떠 있는가>(1993), <박치기!>(2005), <훌라 걸스>(2006) 등 제작.

한국영화 <서편제>(1993), <쉬리>(1999), <공동경비구역 JSA>(2000) <살인의 추억>(2003) 등 일본 배급했다.

일본 조선대학교를 졸업한 후, 프랑스 소르본 대학에 유학했다고. <서편제>는 일본에서 처음으로 히트친 한국영화였다. 

앞서 ‘88 서울올림픽’을 계기로 1988년 일본에서 한국에 대한 관심이 많아졌다.

박병양(朴炳陽) 대표는 올림픽을 계기로 ‘아시아영화사’(アジア映?社)를 설립했는데, 당시 한국 영화를 보는 사람들은 일반 관객은 많지 않아 자이니치에게 후원받아서 배급했다고 한다.

1988년 <고래사냥>, <미미와 철수의 청춘 스케치> 개봉했는데 <고래사냥> 주연 배우 안성기가 도쿄, 오사카 무대인사에서 “올림픽만 아닌 또 하나의 한국도 알았으면 좋겠다”고 말하기도 했다는 

기사가 남아있다.

박 대표는 1980~1990년대 임권택, 이장호, 이두용, 박종원 감독의 <깊고 푸른 밤>, <이장호의 외인구단>,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 등 일본에 배급했고,

2003년 ‘시네콰논’ 이봉우 대표와 함께 부산영화제에서 ‘한국영화공로상’ 수상했다.

잡지 <세카이>에서는 1973~1988년 ‘한국으로부터 통신’ 칼럼을 연재하기도 했다. 1980년 광주 민주화운동이 일본에서는 실시간으로 중계됐다.

1970년대부터 시인 김지하가 인기 끌었고 박정희 정권 비판한 시 ‘오적’ 발표했다. 1979년 박정희 암살 다음날부터 일본 극단 ‘스바루’가 서울 공연 위해 머물렀던 게 정식 교류 처음인 듯하다.

극작가이자 연출가인 가라 주로가 서강대 게릴라 공연도 했고, 조용필은 1982년 일본 데뷔하고 1987~1989년 홍백가합전에 연속으로 출연했다.


□ 전옥숙(1929~2015)의 활약

홍상수 감독 어머니다. “한일관계에 관여해온 많은 사람들에게 그녀는 ‘누나’, ‘언니’, ‘어머니’였다. 한국문학을 일본어로 소개하는 잡지를 발행하거나 교류의 장이 되는 회식 자리를 마련했다.

쉽게 다가가기 어려운 한일의 접점을 계속 만들어줬다.”(아사히신문,2015.12.19자)

1960년 영화평론지 『주간영화』 발행했고, 국내 첫 방송 외주 제작사 ‘시네텔서울’ 회장을 지냈다. 후지TV 한국지사장도 맡았다.

이만희 감독 <휴일>(1968) 제작자였으며 주연 배우 신성일이 “내가 홍상수의 엄마를 이모, 이모 했다” (중앙일보, 2017.10.15자)는 기록도 남아있다.

한국문화를 일본어로 소개하는 잡지 ‘한국문예’ 편집장(1975년~)이었고, ‘나카가미 겐지의 삶/엘렉트라’에도 전옥숙 여사가 등장한다.

전 여사가 나카가미에게 소개한 한국 문화인들은 민속학자 임동권, 작가 최승범, 윤흥길, 한승원, 선우휘, 시인 김지하 등.

(高山文彦『中上健次の生涯 エレクトラ』,文藝春秋,2010) 나카가미는 1985년 『한국현대단편소설(韓?現代短編小?)』을 일본에서 출판했다.

조용필의 일본 매니저 역할도 했던 것 같다. “1980년 무렵 그냥 여러 사람 모이는 가운데서 만났는데, 날 아들처럼 생각했는지 ‘엄마라고 불러’ 그러더라고요.

저한테는 정신적 지주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굉장히 좋은 말을 많이 해 주셨어요. 생각이 깊은 분이었죠”(『중앙일보』, 2018.04.25자)

일본 특파원들은 새로 발령받고 서울에 도착하면 먼저 전옥숙 여사에게 인사했다는 소문도 있다. 『조선일보』 논설위원 선우정 “와카미야 요시부미(若宮啓文) 아사히신문 전 주필을 6년 전 서울에서 처음 만났다.

한국 문화계의 대모로 이름났던 고(故) 전옥숙 여사가 소개했다. '일본에 와카미야만 한 사람이 없다'는 전 여사의 괄괄한 목소리가 생생하다” (『조선일보』, 2016.04.30자)


□ 한일 영화 차이

일본 ロケ弁 로케벤(한국 감독들은 국이 없어서 힘들어한다고)이 있고, 한국은 밥차(일본 스텝들은 밥 맛있었다고)가 있다.

일본은 작품 홈페이지 만들고, 10여장으로 이뤄진 팜플렛을 판다. 인터뷰, 제작 뒷이야기가 실려 있다. 보통 1000엔 정도인데, 3000엔짜리도 있다.

개봉 시기보다 훨씬 전부터 길게 홍보 활동을 한다. ‘언제 개봉하세요?’ 하면 보통 내년... 한국은 제작할 때 지자체 등에서 여러 곳에서 지원을 많이 받는 대신 저예산 영화는 극장 개봉이 어렵다.

일본은 지원금 얻을 수 있는 데가 거의 없고, 후원뿐이지만 저예산 영화도 극장 개봉이 쉽다.

한국의 상업영화는 규모가 크고 배우 출연료도 비싸고 촬영 기간도 긴 편이다. 일본 감독이 가장 부러워하는 게 촬영 기간이 긴 것이다.

배우를 짧은 기간 쓰려고 하니(브로커도 촬영 기간 6개월로 짧았다고) 노동 강도가 엄청 높아서 젊은이들이 영화를 안 찍으려고 한다.

고레에다 감독이 프랑스, 한국 등에서 영화를 찍는 게 이런 거 개선하려는 의도도 있지 않을까 개인적으로 생각하고 있다.

일본은 한국의 영진위에 해당하는 단체가 없다 보니 영화의 노동권에 대해서 이야기해 줄 곳이 없다.


□ 일본에서의 한류 붐

제1차 한류 붐은 2003년 드라마 <겨울연가> 일본에서 방송 계기로 중년 여성들을 중심으로 한 욘사마(배용준) 붐. 드라마가 메인.

제2차 한류 붐은 2010~2011년 쯤. 동방신기, 카라, 소녀시대 등 K-POP 중심. ‘카라 키즈’가 많았다.

제3차 한류 붐은 2017년쯤 트와이스, BTS 등 K-POP 중심.

제4차 한류 붐은 2020년~ 영화 <기생충>, 드라마 <사랑의 불시착>, <이태원 클라쓰> 등. 올해 14개 작품 개봉하는 것도 <기생충>의 영향으로 이어가는 것이라고 본다.